바티칸 시국과 교황 의 역사부터 세계적 영향력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이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면서,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많은 이들이 바티칸 시국과 새로운 교황 선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교황은 전 세계 14억 명이 넘는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작은 주권국가인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기도 합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바티칸 시국의 흥미로운 역사부터 교황의 영향력, 그리고 차기 교황 후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를 알아보겠습니다.
바티칸 시국의 탄생과 역사
교황령에서 바티칸 시국으로
바티칸 시국의 역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심장부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왔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교황들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을 다스렸으며, 19세기 중반까지 약 천 년 동안 ‘교황령’이란 이름 아래 상당한 영토를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1870년,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의 영토를 병합하면서 천 년 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종말을 고했습니다.
당시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을 ‘바티칸의 포로’라고 표현하며 바티칸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로마 문제’는 약 6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교황들은 이탈리아 정부의 권한을 인정하라는 요구에 계속해서 반대했고,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교황청의 독립적 지위를 계속 인정했습니다.
라테라노 조약과 바티칸 시국의 탄생
결정적인 변화는 1929년 2월 11일 무솔리니 정부와 교황청 사이에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이라는 독립 국가가 공식적으로 탄생했습니다.
라테라노 조약의 핵심 내용은 “교황청은 모든 정치적, 세속적 권력을 이탈리아왕국에 넘겨준다.
교황청국가는 바티칸시국으로 바뀌고, 권력을 넘겨준 대가로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바티칸에 대한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공인했으며, 교황령 인수에 대한 보상금으로 17억 5천만 리라를 지불했습니다.
이로써 바티칸 시국은 면적 0.44㎢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가가 되었지만, 가톨릭 교회의 영적 중심지로서 그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바티칸 시국이 이탈리아에 위치한 이유
바티칸 시국이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하게 된 것은 역사적, 종교적 배경이 있습니다. 로마는 기독교의 초기부터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곳입니다.
성 베드로의 무덤과 초기 기독교 유산
바티칸을 구성하는 티베르 강 서쪽 해안 지역은 한때 ‘아제르 바티칸누스’라고 불리던 습지 지역이었습니다.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 황제는 성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을 이곳에서 처형했고, 그들은 현재의 바티칸 언덕 기슭에 있는 묘지에 묻혔습니다.
결정적으로,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324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은 기독교 순례자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초입니다.
교황청의 역사적 본거지
가톨릭교는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 공인된 이래 영향력을 계속 확대했으며, 로마와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교황령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교황청은 이탈리아와 로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비록 19세기에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세속적 권력을 잃었지만, 그 영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는 계속 유지되어 왔습니다.
역대 교황과 그들의 유산
가톨릭 교회의 역사에는 수많은 교황들이 있었으며, 각각 그들만의 방식으로 교회와 세계 역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초기부터 중세까지의 주요 교황들
초기 교황들은 교회의 기반을 다지고 교리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그레고리오 4세(827-844), 니콜라오 1세(858-867), 요한 12세(955-964) 등은 중세 교회의 권위를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교황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으며, 교황들은 종종 유럽의 왕들과 황제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대립교황이 등장하는 등의 분열도 있었습니다.
현대 교황들과 프란치스코 교황
최근의 교황들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가톨릭 교회의 방향을 이끌어왔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그리고 가장 최근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각자 다른 접근방식을 가졌지만, 모두 교회의 현대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특히 2013년부터 2025년까지 12년간 교황직을 수행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기후 변화, 빈곤, 이민자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으며, 2024년에는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을 허용하는 등 개방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교황 선출 과정 콘클라베
콘클라베란 무엇인가?
콘클라베(Conclave)는 교황이 선종하거나 사임한 후 새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단의 비밀회의를 말합니다.
‘콘클라베’라는 말은 ‘열쇠로 잠그는’이라는 뜻으로, 추기경들이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외부와 단절된 채 바티칸 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출 절차와 전통
교황 선출 과정은 엄격한 규칙과 전통을 따릅니다.
만 80세 미만의 추기경만이 투표권을 가지며, 현재 135명의 추기경이 이에 해당합니다.
콘클라베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의 미사로 시작하며, 이후 추기경들은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엑스트라 옴네스(외부인 전원 퇴장)’ 명령이 선포된 후 투표를 진행합니다.
투표는 매일 오전과 오후 각각 2번씩 이루어지며, 전체 추기경 선거인단의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계속됩니다.
투표 결과는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 연기 색으로 알 수 있습니다. 흰 연기는 새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검은 연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이후 콘클라베는 이르면 2025년 5월 초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차기 교황 유력 후보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차기 교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최대 일간지 코리에레델라세라와 미국 가톨릭 신문 등 해외 언론들은 여러 유력 후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교황 후보자 유흥식 추기경
이탈리아 최대 일간지 코리에레델라세라는 총 12명의 차기 교황 유력 후보를 선정했으며, 그중에는 한국인 최초 교황청 장관인 유흥식(74) 추기경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흥식 추기경은 1951년 11월 17일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2021년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2022년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남북 화해를 모색한 포콜라레 운동의 일원으로, 대전교구장 시절 남북 교류에 힘써왔고 4차례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특히 2005년 독일 세계 청년 대회 당시 독일 출신의 베네딕토 16세가, 2013년 브라질 세계 청년 대회 당시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점에 비추어, 2027년 서울에서 세계 청년 대회가 열리는 점이 유추기경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기타 주요 유력 후보들
코리에레델라세라가 꼽은 다른 유력 후보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 피에트로 파롤린(이탈리아, 70세) : 2013년부터 바티칸 국무원장을 지내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2인자’ 역할을 해온 인물로, 실용주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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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필리핀, 67세): ‘아시아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며, 만약 당선된다면 첫 아시아 출신 교황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비슷한 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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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돌린 암봉고 베숭구(콩고민주공화국, 65세): 아프리카 최대 도시 중 하나인 킨샤사의 대주교로, 보수파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15].
이 외에도 마테오 주피, 피에르바티스타 피차발라(이상 이탈리아), 블레이즈 쿠피치, 조셉 토빈(이상 미국), 페테르 에르되(헝가리), 안데르스 아르보렐리우스(스웨덴), 장마르크 아벨린(프랑스), 후안 호세 오멜라(스페인) 추기경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6][8].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차기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이 전해지면서 16세기 프랑스 점성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55년 출판한 ‘예언집’에서 “2025년 나이가 많은 교황의 죽음으로 인해 좋은 나이의 로마인이 선출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자리를 약화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7][16].
또한 후임자에 대해 “검은 피부의 젊은이가 위대한 왕의 도움을 받아 붉은 피부의 다른 사람에게 지갑을 전달할 것”이라는 암시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7]. 일부에서는 ‘검은 교황’이 예수회 사제가 입는 검은 제복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16].
교황의 세계적 영향력
가톨릭 신자수와 외교적 영향력
교황은 전 세계 14억 명이 넘는 가톨릭 신자들의 지도자로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 중 하나입니다[5]. 바티칸 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지만, 그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교황청은 유럽연합은 물론 184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며, UN에서 상주 옵서버 지위를 갖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협상 테이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5]. 비록 전면적인 투표권은 없으나, 회의에 참석하고 논의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국제 문제에 대한 발언권
교황은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5년 파리 기후 협정 합의를 앞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구를 구하기보다는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오만한 무관심”을 비판했으며, 이는 특히 개발도상국들에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5].
또한, 교황청은 2024년 UN 기후 정상회의에서 성소수자 및 트랜스젠더 관련 논란에 개입하기도 했습니다[5]. 이처럼 교황의 발언과 교황청의 행동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 국제 정치와 사회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결론: 변화하는 시대의 바티칸과 교황직
바티칸 시국과 교황직은 2000년 가까운 역사를 통해 많은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한때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던 교황령에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축소되었지만, 그 영적, 도덕적 영향력은 계속해서 전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이후 새롭게 선출될 교황이 어떤 방향으로 가톨릭 교회를 이끌어갈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적 성향의 교황이 될지, 아니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적 행보를 이어갈 진보적 성향의 교황이 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또한 유흥식 추기경을 비롯한 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 추기경이 선출된다면, 이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외 지역 출신의 교황이 되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진행되든, 바티칸 시국과 교황은 앞으로도 세계 역사와 인류의 영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계속할 것입니다.